인격의 세가지 얼굴과 자기혐오
첫째, 내적인 혹은 사적인 인격, 즉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경험하는 '나'가 있다.
둘째, 투사된 혹은 공적인 인격, 즉 때로 페르소나 라고 불리며 다른사람이 봐 주었으면 하는 '나'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공적으로 존재할 때 다른사람에게 내어놓는 자아다.
그리고 셋째, 평판 혹은 추정적 인격. 즉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다른사람들이 규정하는 우리의 인격이 있다.
사적인 인격은 복잡하며 우리의 생각, 태도, 지각, 판단, 성향, 욕구, 선호도, 가치, 감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적인 자아는 이것 말고도 우리가 누구이며 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이상적인 희망 사항인 환상, 바람, 야망 등의 상상적 상물까지 모두 포함한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이 사적인 자아는 긍정적인 특성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런 긍정적인 자아 인식이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낸다고 믿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특성을 높이 평가하길 바라는데, 누군가 이런 기대와 다른 발언을 할 때 우리는 화를 낸다. 예를 들면 이렇다. 만일 독자가 자기는 충성스러우며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빋을 때 다른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면 당신은 당연히 걱정을 하게 된다.
사적인 자아에는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말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특성들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런 몇몇 부정적인 특성들을 고치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해버리려고도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쾌하고 어두운 특성들에는 다른사람들에게 하는 해코지나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상상 그리고 일반적인 속물근성, 탐욕, 세상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환상 등이 포함된다., 쉽게 화를 내거나 이성을 잃어버리는 모습, 다른사람에게 지나치게 오만하거나 까다롭게 구는 모습, 주변 사람들을 퉁명하게 대하는 모습, 그리고 침울하고 의기소침한 모습 등이 바로 인격의 어두운 요소들이다.
한편 공적인 자아 혹은 페르소나는 주변사람들이 자기를 이러저러하게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기 모습이다. 페르소나는 사적인 자아의 부분집합이다. 즉 다른사람이 자기를 이러저러하게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평가하도록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용의주도하게 편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 중에서
먼저, 자기혐오라고 하는 이상, 자기를 혐오하는 자기와 자기에 의해 혐오되는 자기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당한 이유건 부당한 이유건 간에 그 나름의 어떤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혐오되는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혐오되는 것은 항용 '현실적으로' 자기가 실행한 어떤 행위다. 그들 행위를 고찰해 보면, 항용 자기의 어떤 욕구를 만족케 했든가, 또는 만족시킬 가능성이 있었던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여성을 상대로 뻔뻔스럽게 집적거린 것은 혹시 승낙을 얻어내면 단물을 켤 수 있기 때문이다. 비겁하고 미련스러운 짓을 저지르게 되는것은, 어떤 이익 또는 쾌락을 얻을 정정당당한 수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체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선 '천덕스럽다'느니 '얼토당토않다'고 판단할망정, 그것을 입에 담거나 자랑하는 시점에서는 신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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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그들 욕구는 현실의 행위를 야기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현실적 욕구다. 바꾸어 말하면, '혐오되는 자기'란 틀림없는 현실의 자기인 것이다. 그에 반해 '혐오하는 자기'에는 어디를 찾아보아도 현실적 기반이 발견되지 않는다. 자기혐오는, 혐오된 행위의 재발을 저지하는 힘을 갖지 못하고 있다. 술을 마시고 후회하여 금주를 맹세하고도 또 술을 마셔대는 알코올 중독자와 같이, 자기혐오의 경우도 그토록 격렬하게 자기를 혐오하면서도 같은 상황이 되면 또 그 같은 행위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본래 같으면, 혐오는 혐오 대상을 배제하거나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이 없다고 한다면, 자기혐오의 경우 혐오는 과연 진정한 혐오인가 하고 의심스러워진다.
적어도 자기혐오는 현실의 자기에 기반을 가지지 않는다. '혐오하는 자기'란 이를테면 가공의 자기이며, 가공의 자기에서 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혐오는 현실의 자기에 대해서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자기혐오란 필경 '가공의 자기'가 '현실의 자기'를 혐오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면 이 '가공의 자기'는 무슨 필요가 있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가공의 자기'란, 요컨대는, 상스러운 허튼 소리를 지껄이지 않는 자기, 비겁하고 미련스러운 짓을 저지르지 않는 자기다. 바꾸어 말하면, 남이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자기,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자기다.
즉, '가공의 자기'란 사회적 승인과 자존심으로 지탱되고 있다. '가공의 자기' 같은 것은 없는 편이 '현실의 자기'의 욕구를 자유롭게 만족시킬 수 있어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사회적 승인을 잃고 자존심이 상처를 입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고찰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컨대, 무능한 사람이 자기를 유능하다고 생각하고 싶을 때, 또는 비열한 놈이 자신을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경우, 그 낙차를 얼버무리는 데 뒷받침이 되는 것이 자기혐오다. 이에, 자기혐오의 용도가 명백해진다.
아주 지겨운 욕망을 가졌을 때, 당자는 양자택일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 지겨운 짓은 안하겠다는 고급 수준의 사회적 승인과 자존심을 단념하고 욕망의 만족을 얻는 경우와, 그와 반대로 그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단념하고 고급 수준의 사회적 승인과 자존심을 유지하는 경우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같은 양자택일에 직면하여 어느 쪽도 단념하고 싶지 않다. '뽕도 따고 임도 보고 싶다'는 욕심쟁이가 쓰는 속임수의 하나가 자기혐오다. 그는 현실의 차원에서 그 욕망을 만족시키고, 그 만족을 맛본 자기를 비자기화한다.
즉, 딴 차원에 '참된'(기실은 가공의) 자기를 놓고, 현실의 자기 행위를 '참된' 자기와는 관계도 책임도 없는 행위로 간주하며, 마치 어딘가 딴 데서 덤벼든 것인 양 그 행위를 '참된' 자기의 입장에서 혐오한다. 그 혐오가 강렬하면 할수록 '참된' 자기는 더더욱 고결해지고, 현실의 자기는 더더욱 '참다운' 자기에서 단절되고 격리된다.
그 행위는 확실히 자기가 한 짓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때 자기는 정신이 '어떻게 되어 있었던' 것이며, '자기도 모르게 그만 저질러버린' 것이다. 곧 '참된' 자기에서 비롯된 행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역겨운 욕망의 만족을 맛볼 수 있고, 또 고결한 자기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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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여러 사람들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일을 하는 사람이 그 때문에 도리어 차별과 편견의 희생이 되는, 참으로 경우에 맞지 않는 결과가 된다. 유태인에 대한 편견의 한 원인은, 유태인이 사회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금전을 다루는 일을 분담한 데 있었다. 모파상의 소설을 그대로 실현한 양, 나치 독일의 점령에서 해방된 프랑스인들은 독일군에게 몸을 판 프랑스인 창녀들의 머리를 까까머리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점령 아래 놓여 있었던 프랑스인을 위해서는 필요한 짓이었다. 독일 병사들의 환심을 사는 일을 그녀들이 수행한 것이었는데, 프랑스인들은 그런 굴욕적인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현실에 자기혐오를 느껴, 자기의 혐오스런 부분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여 자기혐오를 그녀들에게 전가한 것이었다. 그 비열함은 독일 병사들에게 몸을 판 행위에 비할 바 아니다. 요는 자기혐오처럼 비열한 것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 게으름뱅이 정신분석 중에서



